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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라깡주의 정치의 가능성과 조건: 지젝의 ‘사회적 환상의 횡단’ 개념을 중심으로

by multitude 2019. 9. 24.

<라깡과 현대정신분석> 제13권 1호(2011) 

 

 

한국 라깡주의 정치의 가능성과 조건:

지젝의 ‘사회적 환상의 횡단’ 개념을 중심으로

 

 

김정한

 

 

 

 

I. 사라진 정치의 장소들

 

한국에서 가장 강력한 정치 주체는 공장 노동자였다. 1987년 6월 항쟁 이후 ‘열린 공간’에서 분출한 7-9월 노동자대파업은 한국에서도 노동자들이 맑스주의적인 의미에서 계급으로 구성될 수 있는 잠재력을 보여주었다. 특히 1970년 전태일의 분신을 계기로 초보적인 형태로 시작된 민주노조운동은 1980년대 말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공동체적 연대의 정신으로 공장뿐 아니라 거주 지역, 가족, 학교 등을 노동자운동의 정치 현장으로 전환시켰다. 그러나 오늘날 이 노동자 정치의 장소들은 사라졌다. 공장은 신자유주의적 통치성이 지배하며, 도시 재개발로 인해 주거 공동체는 해체되었고, 소비와 여가의 문화는 노동자 고유의 운동 문화를 침식했다. 사라진 정치의 장소들은 현실 정치에서 노동자라는 명명 자체도 사라지게 하고 있다(김원‧신병현 외 2008: 20-23). 반면에 1995년 민주노총의 출범과 1999년 민주노동당의 창당으로 서구와 유사한 노동조합-진보정당 모델이 정착할 가능성이 엿보이기도 했지만, 대기업-남성-정규직 중심의 민주노총은 대다수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대표하지 못하고 있으며, 2007년 대선 이후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의 분열과 경쟁의 여파로 진보정당들 내부에서 새로운 정치 주체를 조직하는 문제설정은 활로를 찾기 어려운 상황에 직면해 있다.

이와 같은 노동자운동의 쇠퇴와 공장 노동자라는 정치 주체의 상실로 인해 최근 새로운 주체 형성에 관한 문제의식이 크게 주목을 받아왔다. 계급, 민중, 시민 등 기존 정치 주체의 범주들이 비판적으로 재검토되고, 다중, 대중들, 소수자(약소자) 등 새로운 정치 주체의 범주들이 부각되었으며, 2008년 촛불항쟁을 계기로 여성과 청년(청소년)이 한국 정치를 진보적인 방향으로 이끌어갈 전범으로 탐색되기도 했다. 하지만 익히 알려져 있듯이 맑스와 엥겔스는 1848년 혁명과 1871년 파리 코뮨을 겪으며 노동자를 정치 주체로 발견한 바 있지만, 오늘날 공장 노동자에 필적하는 사회적 역량과 대규모 동원력을 갖춘 정치 주체는 여전히 발견되지 않고 있으며, 이는 새로운 정치 주체를 모색하는 무성한 정치철학적 담론들의 결정적인 한계로 작용하고 있다. 물론 계급투쟁이 계급 형성에 선행한다는 알튀세르의 말처럼 새로운 정치 주체는 운동과 실천 과정에서 구성되는 것이므로, 지금처럼 전체 사회운동이 크게 약화되어 있는 정세에서 정치 주체를 발견하지 못하는 책임을 현대 정치철학에 전가하는 것은 온당하지 않다. 그러나 현실의 정치 주체에 조응하지 못하는 정치 주체 담론들은 공허한 이론적 도식에 불과하다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으며, 사회적 영향력을 유지하고 확대하는 데에도 제약이 있을 수밖에 없다. 예컨대 한동안 사회적 상상력을 자극하고 지적 토론의 중심에 있었던 들뢰즈 사상이 점차 대중적 인기를 잃고 있는 까닭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진태원 2011: 490-491).

반면에 라깡의 정신분석학은 지젝이라는 ‘스타 철학자’의 역할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정치 주체 담론을 주도하는 데 일정하게 실패했다고 할 수 있는데, 이는 라깡의 텍스트 자체의 난해함 때문만은 아니다. 오히려 한국의 라깡주의자들이 라깡의 정신분석 담론을 적합한 정치(학)으로 번역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물론 개인의 무의식을 다루는 정신분석학이 과연 사회정치적 차원에서도 유효한 발언력을 가질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서는 프로이트 시대부터 논란의 중심에 있었다. 그러나 비록 라깡 자신은 직접적인 정치 참여에 소홀했고 상당히 보수적인 관점을 갖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창안한 주요 개념들은 정신분석학의 본령인 임상 치료와 무관하게 사회, 문화, 정치 현상을 분석하는 데 활용되어 왔다. 특히 라깡주의 정치학의 두 가지 주요 판본이라고 할 수 있는 라클라우의 급진민주주의론과 지젝의 프롤레타리아 혁명론은 서구에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으며, 라깡주의 좌파의 주요 논쟁 지점을 형성하고 있다(이현우 2010).[주1 세 번에 걸친 라클라우와 지젝의 논쟁에 대해서는 김정한(2011 근간) 참조.] 하지만 한국에서 급진민주주의는 1980년대 사회구성체 논쟁과 1990년대 민중운동의 몰락, 시민운동의 부상 과정에서 독자적인 입지를 구축하지 못했으며, 프롤레타리아 혁명론은 한국의 정치 환경에서 생경한 것으로 치부되고 있을 뿐이다. 한국 정치학계에서 라깡에 대한 참조가 전혀 없다는 것은 그 단적인 사례이다.[주2 예를 들어 최근에 한국에서 최초로 급진민주주의를 표방하며 창간된 급진민주주의 리뷰 <데모스>에서도 라클라우와 지젝에 대한 비판적 논의는 일부 있어도 라깡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다(급진민주주의 연구모임 2011). 이는 한국의 급진민주주의론이 그람시를 계승하는 것이라고 자기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지식사회의 사정은 라깡의 정신분석학이 오늘날 한국의 정세에서 과연 적합하게 정치적으로 번역될 수 있는지, 그 조건은 무엇인지에 관해 탐구해볼 필요성을 제기한다. 이 글에서는 특히 사회적 환상의 횡단(traversing the social fantasy)이라는 개념에 주목하여 그 정치적 함의를 살펴볼 것이다. 이 개념은 임상 치료에서 정신분석의 끝에 해당하는 근본 환상의 횡단을 사회정치적 차원에 적용한 것으로서 이데올로기 비판의 가장 핵심적인 대안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이를 통해 정치 주체에 대한 고민만이 아니라 정치의 장소를 사유하는 데에도 작은 기여를 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II. 사회적 환상의 횡단과 주체의 동일화

 

1. 이데올로기 비판과 사회적 환상

 

먼저 지젝이 제시한 초기의 문제설정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Zizek 1989/2001). 고전적 맑스주의를 비판하면서 지젝은 증상과 환상을 구별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증상은 이데올로기의 장에 이질적이면서도 그것을 완결시키는 데 불가결한 것이다. 이데올로기를 현실을 은폐하는 허위의식으로 파악하는 고전적 맑스주의에서 이데올로기 비판은 주체에게 증상의 본질을 드러내는 데 있다. 주체는 자신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데올로기의 또 다른 형식인 냉소주의에 대해서는 이런 고전적 이데올로기 비판은 효력이 없다. 주체는 자신이 하는 일을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실과 이데올로기의 간극을 잘 알고 있는 냉소적 이성에 대한 이데올로기 비판은 증상이 아니라 환상에 개입해야 한다. 환상은 현실을 은폐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 자체를 구조화하는 것이며, 내적인 믿음이 아니라 외적인 행위의 차원에서 작동한다. 환상은 주체에게 사회적 활동과 실천의 좌표를 제공하고, 주체는 마치 모른다는 듯이 행위를 반복함으로써 환상이 구성하는 현실을 재생산한다.

이와 같은 증상과 환상의 구별은 이데올로기 비판에 두 가지 단계가 있음을 함축한다. 첫째 증상의 해석이다. 주체는 증상의 논리에 무지하며, 이를 해석하고 인지할 때 증상은 해소될 수 있다. 해석은 증상의 이면에 숨겨져 있는 상징적인 과잉결정의 네트워크를 밝혀내는 것이다. 둘째 환상의 횡단이다. 증상과 달리 환상은 해석될 수 없다. 환상은 주체에게 현실 자체를 제공하는 것이므로 환상의 이면에 숨겨져 있는 현실은 없기 때문이다. 주체는 환상의 논리에 무지하지 않으며, 단지 상징적인 과잉결정의 네트워크에 물질화되어 있는 외적 믿음에 근거해서 행위할 뿐이다. 따라서 환상의 차원에서는 횡단만이 가능하다.

 

환상은 해석될 수 없으며 단지 ‘횡단’만이 가능하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어떻게 환상의 ‘이면’에 아무 것도 없는지를, 어떻게 환상이 정확히 그 ‘아무 것도 아닌 것’을 가리고 있는지를 체험하는 것이다. (그러나 증상의 이면에는 많은 것, 상징적 과잉결정의 네트워크 전체가 있으며, 이런 이유로 증상은 해석을 수반한다.)(Zizek 1989/2001: 220, 번역 수정).

 

다시 말해서, 증상의 해석이 증상을 상징 질서 내부로 상징화하는 것이라면, 환상의 횡단은 상징 질서에 대한 믿음에 아무 근거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 환상과 거리를 두는 것이다. 따라서 증상의 차원에서 이데올로기 비판이 상징 질서와의 관계에서 증상의 의미를 분석하는 것이라면, 환상의 차원에서는 상징 질서에 일관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환상 너머에 의미의 공백이 있으며, 그에 대한 믿음에 근거한 행위는 궁극적으로 무의미한 것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와 같이 증상의 해석과 환상의 횡단은 주어진 상징 질서의 좌표를 변화시키는 상호 보완적인 절차이다.

그러나 증상의 해석과 환상의 횡단에도 불구하고 증상은 완전히 해소되지는 않는다. 증상은 주체가 향유를 조직하는 하나의 방편이기 때문이다. 주체는 자신의 향유를 어떤 상징 기표와 매듭처럼 묶어서 자신의 존재의 일관성을 유지하며, 증상은 주체의 세계-내-존재의 최소한의 일관성을 보증하는 방편이다. 따라서 증상이 완전히 해소될 수 없고, 심지어 그럴 경우 주체의 존재가 파멸할 수 있다면 유일한 길은 증상과 동일화(identification)하는 것이다.

 

이 근본적인 차원에서 증상이 해체된다면, 이것은 문자 그대로 ‘세계의 종언’을 의미한다. 증상에 대한 유일한 대안은 무(無)이다: 순수한 자폐증, 정신적 자살, 죽음충동이나 심지어 상징적 우주의 총체적 파괴에 대한 굴복이다. 정신분석 과정의 끝에 대한 라깡적인 최종 정의가 증상과의 동일화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환자가 증상의 실재 속에서 자신의 존재의 유일한 버팀목을 인지할 수 있을 때 분석은 끝에 도달한다(Zizek 1989/2001: 136, 번역 수정).

 

따라서 환상의 횡단은 증상과의 동일화를 동반한다. 라깡의 정신분석학에서 증상과의 동일화는, 증상이 해석을 통해 완전히 사라질 것이라는 초기의 가정을 철회하고, 환상의 횡단 후에도 남아 있는 증상을 받아들이고 그와 공존하는 법을 찾아야 한다는 것을 함의한다. “라깡에 따르면 정신분석학이 창립되던 시기의 특징이었던, 증상들의 (완전한-옮긴이) 해소 가능성이라는 믿음은 옳지 못하다. 증상은 주체에게 고정점을 주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정신분석학 치료를 통하여 주체는 자기의 증상과 더불어 살아가고, 그것과 자신이 공존해야 한다는 것을 배워야 한다”(Widmer 1990/1998: 246).

그런데 증상과의 동일화를 정치적 맥락에 위치시킬 때, 지젝은 라클라우가 제시한 바 있는 헤게모니적 실천과 등가연쇄(chain of equivalence)를 고려하고 있다. 지젝에 따르면 맑스주의의 관점에서 사회적 증상은 보편적 원리의 구성적 ‘계기’이면서, 그 보편적 토대를 전복하는 특수한 ‘요소’이다(Zizek 1989/2001: 49). 예컨대 자본주의의 대표적인 사회적 증상은 프롤레타리아트이고 서구 사회에서 그것은 유태인이다. 이와 같은 논의에서 계기(moment)와 요소(element)의 구별은 라클라우에서 유래한다. 그는 차이들을 절합하는 실천의 효과로 생겨나는 구조화된 총체성을 담론(또는 담론구성체)라고 지칭하는데, 이 담론 내부로 절합되는 차이를 계기라고 하고 그렇지 않은 차이를 요소라고 한다(Laclau 2001/1990: 131). 헤게모니적 실천은 차이의 요소를 총체성의 계기로 절합하여 등가연쇄를 구성하는 것이다(김정한 2010). 따라서 지젝이 사회적 증상과의 동일화를 요약하는 구호로서 ‘우리 모두가 유태인이다’, ‘우리는 모두 체르노빌에 살고 있다’, ‘우리는 모두 보트 피플이다’ 등을 제안할 때, 이는 일반적인 의미에서 다양한 실천들의 연대를 함의할 수도 있지만, 또한 특정하게 라클라우의 헤게모니적 실천과 등가연쇄의 구성을 염두에 두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지젝은 이와 같은 증상과의 동일화를 수단으로 삼아서 환상을 횡단해야 한다고, 즉 증상이 출현하는 환상의 틀을 거부하고 전복해야 한다고 주장한다(Zizek 1991/1995: 227).

 

 

2. 증상과의 동일화 대 환상과의 동일화

 

지젝의 문제설정을 따라서 보다 체계적으로 라깡의 용어법을 활용하여 라클라우와 지젝을 종합하려는 이가 스타브라카키스이다. 그는 라깡의 정신분석학과 윤리학이 급진민주주의를 실천하는 데 필수적이라고 강조하고, 그 두 축으로 승화와 증상과의 동일화를 제시한다(Stavrakakis 1999/2006: 319-328). 라깡의 정의에 따르면 승화(sublimation)는 대상을 사물을 위엄으로 격상시키는 것이며, 이는 상실된 불가능한 실재를 재현하려는, 즉 재현할 수 없는 것을 재현하려는 시도로 나타난다. 스타브라카키스는 승화가 잃어버린 사물의 공백을 재현하는 과정에서 재현할 수 없는 것을 위한 공통의 공간을 창조하며, 이런 승화의 윤리는 공백과 결여를 기반으로 삼아서 실재의 불가능성을 제도화하려는 급진민주주의와 동일한 바탕을 이루고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상상을 본질로 하는 승화는 환상에 의해 제약될 수 있기 때문에 반드시 증상과의 동일화가 필요하다.

그렇지만 증상과의 동일화에 관한 스타브라카키스의 논의는 지젝의 것을 거의 그대로 차용하고 있다. 사회적 증상과의 동일화는 증상(사회적 장에서 배제된 진리)을 보편성으로, 주체의 동일화 지점으로 격상시키는 것이며, 그는 아테네 반인종주의자들의 구호인 ‘우리 모두는 집시이다’를 대표적인 예로 들고 있다.[주3 지젝도 사회적 증상과의 동일화는 보편성을 배제의 지점과 동일화하는 것이라고 진술한 바 있다. “한 나라에 사는 사람들을 ‘정식’ 시민과 일시적 이주노동자로 하위구분하는 것은 ‘정식’ 시민을 특권화하고 이주자들을 고유의 공적 공간에서 배제시킨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은 손쉬운 일이다. 이론적으로건 정치적으로건 이보다 훨씬 더 생산적인 것은 보편성을 배제의 지점과 동일화하는 정반대의 작업이다(이는 헤게모니의 ‘진보적’ 전복을 위한 길을 연다)--우리의 경우, 이런 동일화는 ‘우리 모두가 이주노동자’라고 말하는 것이다”(Zizek 1999a/2005: 367).]

 

여기서 촉구하는 것은 사회적 증상과의 동일화 및 사회적 환상의 횡단과 양립하는 태도이다. 불가능한 재현을 받아들이고 불가능성을 선언할 때에만, 불가능한 것을 ‘재현’하거나 나아가 그 재현의 불가능성과 동일시할 수 있다. 따라서 증상과의 동일화는 환상의 횡단과 관계한다. 환상의 횡단은 환상이 가리고 있는 대타자 내의 결여나 비일관성을 자각하게 해주고, 대상 a와 대타자를 분리시키며, 이런 분리는 윤리적일 뿐 아니라 우리의 정치적 상상력에 대해 ‘해방적’이다(Stavrakakis 1999/2006: 327, 번역 수정).

 

욕망의 원인인 대상 a와 관련해서 보자면, 증상과의 동일화를 통한 환상의 횡단은 대타자 내에 존재한다고 가정된 대상 a가 근본 환상 안에서 대타자의 결여를 메우는 상상적 표상에 불과함을 자각하는 것이고, 이를 통해 대타자의 욕망에 종속된 상태를 벗어나 자신의 고유한 욕망과 향유를 발견하는 것이다. 따라서 분석의 끝에서 환상의 횡단은 대타자와의 분리, 상징계와의 분리를 수반한다(Chiesa 2007: 161-162; Dunand 2003).

그런데 스타브라카키스는 상징계의 결여와 공백을 제도화하는 것으로 민주주의를 규정하고, 그 독특한 제도가 선거라고 명시한다. 선거는 사회의 구성적 결여와 우연적 본성을 정기적으로 분출하도록 하는 제도이다.

 

우리가 때때로 선거를 필요로 한다면, 그것은 구체적 내용과 그 충만성의 체현 간의 헤게모니적 연계가 끊임없이 재확립되고 재협상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우리가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민주주의 내에서 증상(대개 단순한 부수현상으로 나타나는 사회적인 것의 구성적 적대)과 동일시하고 조화로운 사회 질서라는 환상을 횡단하는 하나의 방식이다(Stavrakakis 1999/2006: 332, 번역 수정).

 

여기서도 스타브라카키스는 선거에 대한 지젝의 견해를 직접 인용하고 있다(Zizek 1989/2001: 147). 하지만 지젝은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의 2판 서문에서 그동안 자유민주주의적 정치적 태도의 잔재를 청산하지 못했다고 반성하면서 민주주의를 새롭게 정의하고, 더불어 라클라우의 급진민주주의를 비판하기 시작한다. 민주주의는 근본적인 포함과 배제를 결정하는 창시적인 비민주주의적 선택이 이루어진 장이며, 사회적 적대는 민주주의적 경합(agonism)의 형식으로 번역될 수 없다는 것이다(Zizek 2002a/2004: 102-103).

이와 관련해 스타브라카키스는 후속 저작인 <라깡주의 좌파>에서도 환상의 횡단에 대한 기존의 입장을 고수하고 있지만(Stavrakakis 2007: 276)[주4 이 책에서 스타브라카키스는 승화 및 증상과의 동일화 외에 정신분석학적 윤리학의 세 번째 축으로 보충(suppléance)을 제시한다. 그에 따르면, 상징적 수준에서 구조화된 결여를 은폐하지 않는 보충적(supplemental), 과잉적(excessive) 요소의 생산이 가능하며, 이는 기표의 언어 내에 있는 결여와 부재를 보충하는 것이지만, 환상 속의 대상 a로 기능하는 것이 아니라 환상을 넘어서 작동한다. 환상적 욕망이 대타자 내의 결여의 기표를 환상 속의 대상 a로 대체한다면, 정신분석학적 정치의 과제로서 보충은 대타자 내의 결여의 기표로부터 대상 a를 분리시키는 것, 결여의 민주적 제도화로부터 (반민주적이고 탈민주적인) 환상을 분리시키는 것이며, 이는 환상을 넘어서 부분 향유를 가능케 한다(Stavrakakis 2007: 279-280). 스타브라카키스에게 이 보충적 요소는 급진민주주의이다. 이에 대해 지젝은 보충이 반드시 민주주의와 결합하지는 않으며, 민족주의나 애국주의 또한 그런 보충의 이름이 될 수 있다고 비판한다(Zizek 2008/2009: 497). 스타브라카키스가 라깡과 양립할 수 없는 ‘대상 a 없는 욕망’을 상정하는 이유는 대상 a를 욕망과 관련해서만 사고하고, 대상 a와 충동의 관계를 무시하기 때문이다. 대상 a는 욕망의 원인이면서 동시에 충동의 대상이다(Zizek 2008/2009: 491-493).], 이를 비판하면서 지젝은 환상의 횡단에 대해 다른 해석을 제기한다.

 

충동의 과잉을 무시하기 때문에 스타브라카키스는 마치 환상이 우리의 부분 대상들과의 관계를 부예지게 하는 환영적 스크린인 것인양 ‘환상의 횡단’에 관한 단순화된 통념을 전개한다. 이런 통념은 정신분석의 임무에 대한 상식적인 관념과 완벽하게 부합한다. 물론 정신분석은 우리를 개인 특유의 환상들로부터 해방시켜 실제 그대로의 현실과 대면할 수 있게 한다…. 그러나 정확히 이것은 라깡이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의 목적은 거의 정반대이다. 일상적 실존에서 우리는 (환상에 의해 구조화되고 지탱되는) ‘현실’에 침잠해 있으며, 이런 침잠은 우리 정신의 또 다른 억압된 차원이 이런 침잠에 저항한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증상에 의해 교란된다. 따라서 ‘환상의 횡단’은 역설적으로 환상과의 완전한 자기 동일화, 즉 일상적 현실에의 침잠에 저항하는 과잉을 구조화하는 환상과의 동일화를 의미한다(Zizek 2008/2009: 494, 번역 수정).

 

지젝은 스타브라카키스가 환상의 횡단 이후에도 남아 있는 충동의 과잉(또는 잉여향유로서의 대상 a)을 간과하고 있으며, 이 때문에 현실을 은폐하는 것으로 환상을 사고하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다. 오히려 환상은 현실을 구성하는 것이며, 환상을 횡단하기 위해서는 이렇게 구성된 현실에 저항하는 증상을 구조화하는 환상과 동일화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요컨대 증상과의 동일화가 아니라 환상과의 동일화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물론 환상과의 동일화는 전혀 새로운 개념화는 아니다. 이미 <환상의 돌림병>에서 지젝은 환상과의 과잉동일화(overidentification)를 통해 환상의 지배력을 훼손시킬 가능성이 있다고 언급한 바 있다(Zizek 1997/2002: 149). 흥미로운 점은 자신의 글들을 ‘짜집기’해서 펴낸 라깡에 관한 대중적인 입문서에서 환상을 다룰 때에도, 증상과의 동일화에 관한 내용은 전혀 수록하지 않은 채 “환상과의 과도한 동일화를 통해 환상의 포획에서 벗어날 가능성이 열린다”고 주장하고 있다는 것이다(Zizek 2007/2007: 88). 그가 예로 들고 있는 것은 맥주 광고이다. 한 여성이 개구리를 발견하고 키스를 하자 개구리는 멋진 남성(완전한 남근적 존재)으로 변하지만, 이 남성이 여성에게 키스를 하자 여성은 한 병의 맥주(부분대상, 대상 a)로 변한다. 여기서 환상과의 동일화는 여러 가지 모순된 환상 요소들(여성의 환상과 그에 비대칭적인 남성의 환상)을 동시에 중첩시키는 것이며, 그 결과는 ‘맥주병을 안고 있는 개구리의 형상’이다. 이와 같이 모순적이고 비대칭적인 환상들의 중첩이 환상의 주문에서 깨어날 수 있는 방법으로 제시되고 있다.

물론 지젝이 증상과의 동일화 개념을 명시적으로 폐기한 적은 없다. 그러나 앞서 살펴본 것처럼, 증상과의 동일화는 라클라우의 헤게모니적 절합을 통한 등가연쇄의 구성과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이후 자기 비판을 통해 급진민주주의와 결별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지젝이 환상의 횡단을 증상과의 동일화보다 환상과의 동일화로 재개념화하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스타브라카키스에 대해서도 민주주의를 타자 안의 결여의 제도화로 정의하는 것은 대타자를 민주적으로 합법화하고 정당화하는 데 불과하며, 이는 결여의 기표 자체에 어떤 전복성이나 진보성도 없기 때문이라고 반박한다. 또한 그의 ‘향유의 정치’는 근대 사회가 총체적인 향유의 결여를 특징으로 한다고 보는 낡은 프로이트-맑스주의의 새 판본일 뿐이며, 대상 a를 환상의 기능으로 축소시킴으로써 환상을 횡단한 후에 욕망이 대상 a이 없이 작동하는 ‘부분 향유’의 사회를 꿈꾸는 것은 기괴하고 공허한 주장이라고 비판한다(Zizek 2008/2009: 456-500).[주5 안티고네에 대한 해석을 둘러싼 지젝과 스타브라카키스의 논쟁에 대해서는 Stavrakakis(2003/2008); Zizek(2003/2008); 신명아(2006) 참조.]

더구나 󰡔시차적 관점󰡕에서 지젝은 레비나스의 윤리학(타자의 고통에 대응해 ‘내가 여기 있어요!’라고 응답하는 윤리적 주체)을 비판하면서, 자신도 증상과의 동일화의 대표적인 구호로 제시했던 형식이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Homo Sacer, 벌거벗은 생명)에는 적용될 수 없는 한계가 있다고 우회적으로 지적하고 있다. 호모 사케르처럼 법 내부에 포함되어 있으면서도 자신의 실존에 대해 어떤 권리도 갖지 못한 채 배제되어 있는, 적나라한 폭력에 노출되어 있는 존재의 경우에 증상과의 동일화는 역겨운 일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무젤만은 정확히 더 이상 ‘내가 여기 있어요!’라고 말할 수 없는 자라고 할 수 있다. … ‘우리는 모두 사라예보의 시민들이다!’와 같이 범례적 희생자와 동일시하는 거창한 행동을 생각해보라; 무젤만의 문제는 정확히 이러한 행위가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는 것이다. 격정에 가득차서 ‘우리는 모두 무젤만들이다!’라고 외치는 것은 역겨운 일이다(Zizek 2006/2009: 228).

 

 

III. 사회적 환상의 횡단을 위한 정치적 조건

 

사회적 환상의 횡단에 대한 라깡주의 좌파의 해석은 증상과의 동일화에 초점을 맞추면서 급진민주주의를 주장하는 입장과, 이를 비판하고 환상과의 동일화라고 재해석하면서 민주주의가 아니라 공산주의를 제창하는 입장으로 나뉘어 있다. 하지만 환상의 횡단에 관해 다루는 국내 연구 가운데 환상과의 동일화에 주목한 것은 아직 없는 것 같다. 대체로 증상과의 동일화를 환상의 횡단이나 진정한 정치적 행위의 전범으로 결론을 내리고 있을 뿐이다.[주6 물론 모든 문헌을 전부 검토한 것은 아니다(특히 맹정현 2009; 박찬부 2006; 이만우 2006; 홍준기 2005; 홍준기‧박찬부 2005 참조). 내가 발견한 예외는 김소연이다(2008: 246). 그녀는 각주에서 환상의 횡단에서 유의할 점은 “결코 환상을 아는 것이나 그로부터 거리를 두는 것으로는 불충분하며 ‘상상의 영역과의 과잉동일화’를 통해서, 즉 환상을 구축하고 지탱해주는 그 욕망을 끝까지 고집함으로써만 가능하다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그녀가 전거로 드는 문헌은 Zizek(1999b) 참조. 이와 다른 차원에서 이만우(2010)는 ‘우리’와 ‘그들’을 폭력적으로 구별하는 남성 주체성의 ‘조증적 환상’을 가로지르는 정치 윤리로서 여성 주체성의 (남근을 소유하지 않는) ‘무소유와의 동일시’를 제시하는데, 이는 매우 독창적인 시도이지만 여전히 스타브라카키스의 ‘증상과의 동일화’를 바탕에 두고 있다(이만우 2010: 375).]

오히려 환상의 횡단에 대한 비판들은 여럿 제출된 바 있는데(김종갑 2008; 김현 2010; 정정훈 2010; 진태원 2008), 그 공통적인 비판의 핵심은 정신분석학에서 제시하는 환상의 횡단이 개인에게 부과하는 칸트의 정언명령과 유사한 준엄한 윤리적 요청일 뿐이며, 개인에게 윤리적 선택을 요구하는 것만으로는 진정한 정치적 행위를 실행하는 데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사회의 근본적인 변화 가능성을 믿고 그것을 추구하는 윤리적 태도와 행위가 중요하다고 역설하는 것으로는 개인의 윤리를 사회적 차원에서 정치적 행위로 연결하기 어렵다.[주7 이와 비판의 맥락이 다르기는 하지만 홍준기도 지젝의 행위 개념에 많은 비판이 제기되는 것은 “결국 지젝이 행위 개념에 대한 체계적인 철학적(헤겔적) 설명을 ‘명확하게’ 제시하는 데 성공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평가한다(홍준기 2010: 213).]

 

환상을 넘어 그것과 대면한다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이는 환상 없는 세계로 우리가 가야 한다는 의미인가? 아니면 하나의 환상을 또 다른 환상으로 대체해야 한다는 뜻일까? 억압적이고 보수적인 환상을 해방적이고 진보적인 환상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것인가? 이 문제에 대해 지젝의 입장은 모호하다. 환상을 가로지른다는 것이 환상 너머로 간다는 것인지, 아니면 새로운 환상을 구축한다는 것인지에 대한 명쾌한 답변이 없는 것이다(정정훈 2010: 116).

 

이런 비판들은 상당히 타당성이 있다. 개인의 윤리적 결단이나 비극적이지만 영웅적인 행위를 강조하는 것은 정치적으로 한계가 명확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히려 사회적 환상의 횡단에 관한 논의에서 결정적으로 누락되어 있는 것은 분석가의 역할과 기능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라깡의 임상치료에서 분석자(분석주체)가 환상을 횡단하고 분석의 끝에 도달하는 과정에서 분석가의 기능은 필수적이다. 분석가는 주체의 체험적 세계를 지배하는 근본 환상에서 주체가 벗어날 수 있도록 하는 유일한 사람이며(Zizek 2007/2007: 84), 임상 분석은 분석가와 분석자의 상호작용을 통해 가능하다(Fink 1997/2002).

 

정신분석은 자신의 실재 세계에, 즉 무의식에 무언가 문제를 느끼고 정신분석을 하기 위해 찾아온 분석주체 스스로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분석가 없는 순수한 자기 분석이 완전히 가능하다는 말은 아니다. … 분석가는 일반적인 정신분석적 ‘교리’ 혹은 ‘지식’을 바탕으로 분석 대상(객체)을 분류, 진단, 처방하는 ‘지배자’의 역할이 아니라, 환자가 전이의 효과를 확인하고 자신의 무의식을 탐구하는 데 그 전이의 효과를 이용할 수 있도록 분석 공간을 제공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홍준기 2008: 15-16).

 

분석 작업을 수행하는 이가 분석자 자신이라는 원리는 마치 노동 해방은 노동계급 스스로의 힘으로 쟁취해야 한다는 맑스의 언급을 연상시키지만, 그렇다고 해서 분석가 없는 순수한 자기 분석이 가능한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환상의 횡단과 관련해서는 대부분 마치 분석가의 역할과 기능이 불필요하다는 듯이 그에 관한 논의를 생략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라깡의 정신분석학을 정치(학)으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분석가의 기능을 담당하는 정치적 대행자에 대한 사유가 부족하다. 이 때문에 환상의 횡단이 마치 개인의 영웅적인 결단과 선택에 달려 있는 것처럼 비춰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정치적 차원에서 분석가의 역할과 기능을 담당하는 것은 무엇인가? 일반적으로 정치 지도자나 정치 조직을 상정해볼 수 있을 것이다. 대중들을 대표하면서도 교리나 지식, 정보를 통해 대중들을 지배하지 않으며, 대중들 스스로 자신의 해방에 도달할 수 있도록 개입하는 지도자, 의견 그룹, 조직 등이 사회적 환상을 횡단하는 데 필수적이지 않을까? 이와 관련해 지젝은 비록 사회적 환상의 횡단과 명시적으로 연결해서 논의하지는 않을지라도 문제의 핵심을 잘 지적하면서 정당을 내세운다. 분석자가 자신을 스스로 분석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정신분석 치료에서 분석가의 외부성이 필수적이듯이, 노동계급의 해방에서 외부로부터 개입하는 당의 외부성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 지젝이 의미하는 바는 진리를 독점하는 악명 높은 ‘전위 정당’이 아니라, 실증적 지식의 권위가 아니라 지식의 ‘형식’에 의한 권위를 갖는, 분석가의 기능을 하는 ‘정신분석학적 정당’이다(Zizek 2002b/2008: 306-309). 그는 당이라는 형식 없는 운동은 저항의 악순환에 사로잡힐 뿐이고, 당이라는 조직 없는 정치는 ‘정치 없는 정치’이며 ‘혁명 없는 혁명’을 원하는 것이라고까지 질타한다(Zizek 2002b/2008: 534).

혁명 정당에 대한 요청은 유의미한 정치적 변화를 일으키기 위해서는 조직적인 행동이 필요하다는 평범한 진실을 환기시킨다. 혁명 정당이라는 낡은 맑스주의적 수사학을 통해서 지젝은 집단적인 행동과 연대에 관해 사유하도록 촉구하고 있다. 특히 행위를 정치화하는 당의 역할, 그리고 당과 진리의 관계에 주목해볼 수 있다(Dean 2006: 196-197). 대중들의 ‘행위로의 이행’ 자체는 맹목적인 분출에 불과하며, 파괴와 폭력 자체는 본연의 정치적 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해석, 번역, 대표(표상)되어야 하며, 이것이 당의 역할이다. 당은 ‘행위로의 이행’에 관한 상황의 진실을 해석하고 대표함으로써 기존의 상징 좌표에서는 허용될 수 없는 어떤 새로운 것이 가능해지는 공간을 창출하기 위해 지배적인 사유 방식을 깨뜨린다. 또한 당은 객관적인 진리가 아니라 하나의 정치적 관점으로서의 진리를 제시하며, 이는 당이 진리의 형식을 체현함으로써 사회에서 배제된 요소의 장소를 점유하고, 통합적인 총체성을 전제하는 폐쇄된 보편성이 아니라 비-전체로서의 보편성을 표상하고 대표하는 과정이다.

그러나 혁명운동에서 정당 형태는 역사를 갖고 있다. 다시 말해서 정치 조직에 대한 요청이 반드시 정당으로 수렴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1970년대 후반에 맑스주의의 위기를 선언한 바 있는 알튀세르는 그 위기가 맑스주의에 내재적인 난점과 공백에서 유래한다고 지적하면서 그 가운데 하나로 계급투쟁의 조직에 관한 이론을 들고 있다(Althusser 1977/1992: 71). 그 효과는 ‘모방’이었다. 알튀세르는 맑스주의적이고 공산주의적인 실천이 정당을 중심으로 조직되는 역사적 과정이 사실상 부르주아 국가장치 및 군사기구를 모방하는 데 불과했다고 진단한다.

 

정치에 대해서 보자면, 무엇보다도 정치를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에 의해 정치적으로 승인된 공식적인 형태들(국가, 인민대의제, 국가권력을 소유하기 위한 투쟁, 정당 등)로 환원시키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 그리고 당연히 공산당의 조직 형태도 의문에 붙여지고 있어요. 왜냐하면 그것은 정확히 부르주아적인 정치적 장치의 모델에 따라 건축되었기 때문입니다. 정치에 대한 공산주의적 관념이 이렇듯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에 의해 근본적으로 얼룩져 있는 것이 노동운동의 미래를 좌우할 바로 그 지점이라는 사실은 아주 분명합니다(Althusser 1978a/1992: 82-83).

 

마찬가지로 알튀세르는 프랑스공산당 또한 부르주아 국가장치에 근거해 있으며 정치의 부르주아적 기능 방식을 답습하고 있다고 비판한다(Althusser 1978b/1992: 130-133). 공산당이 대중운동과 분리되고, 지도부와 기층당원들이 수직적으로 분할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알튀세르는 맑스주의의 위기의 핵심에 정당 형태의 위기가 있다고 하면서 정당은 계급투쟁의 잠정적 조직 형태일 뿐이라고 정당 형태를 상대화한다(박상현 2008).

더구나 한국 사회에서 과연 분석가의 기능을 수행하는 정당의 구성이 가능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많다. 현재 한국의 진보정당-노동조합 모델이 직면한 한계는 ‘쉐보르스키의 딜레마’라고 알려져 있다.

 

계급 정당의 지도자들은 계급적 호소에서는 동질성을 갖지만 선거에서는 항구적 패배를 선고 받은 정당과, 계급적 정향을 훼손하는 대가로 선거의 승리를 위해 투쟁하는 그러한 정당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이것이 민주적 자본주의 사회에서 계급구조와 정치제도의 특수한 결합에 의해 사회주의당, 사회민주주의당, 노동당, 공산당, 그리고 여타 정당에게 제공된 양자택일의 대안이다(Przeworski 1986/1995: 137).

 

진보정당-노동조합 운동은 계급적 변혁을 강조할 경우 득표에 실패하여 의회 진출이 좌절되거나, 의회 진출을 위해 더 많은 득표를 얻기 위해서는 탈계급적 지향을 추구할 수밖에 없는 구조적 조건 속에 놓여 있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이른바 당 좌파(Party Left)와 사회적 좌파(Social Left)의 갈등은 더욱 심화되고 있다. 당 좌파가 정당 등의 정치조직을 중심에 두고 정권을 장악하거나 변혁 기관으로서의 역량을 축적하는데 집중하는 세력이라면, 사회적 좌파는 자율적인 다양한 사회운동을 중심에 두고 다양한 형태의 네트워크를 형성하는데 집중하는 세력이다. 한편에서 사회적 좌파는, 당 좌파가 주어진 정치 활동의 규칙에 적응하면서 보수정당과 똑같은 정치 기술을 습득하여 선거에서 유리한 성과를 얻고자 할 뿐이라고 비판한다. 당 좌파의 활동은 자유민주주의적인 게임의 규칙을 벗어나지 못하고, 설령 득표에 성공해서 의회에 진출하더라도 집단적인 대중 활동을 통해 변화를 촉진하기보다는 기능적인 의원직이나 행정직을 수행하는 데 머물곤 한다는 것이다. 반면에 다른 한편에서 당 좌파는 사회적 좌파가 제도정치를 총체적으로 불신하면서 가능한 법적, 제도적 개선을 포기한다고 비판한다. 사회적 좌파는 현실 정치에 대해 무지한 채 어떤 유의미한 정치적 대안도 역량도 없이 탈정치화나 무정부주의를 주장하는 철부지 공상가라는 것이다. 당 좌파는 국가를 경유하지 않고 어떻게 대규모적이고 전국적인 법적, 제도적 개혁을 실현시킬 것이냐고 반문한다(김정한 2004: 191-192).

이와 같은 대립은 양쪽이 각각 반쪽의 진리를 담고 있다. 당 좌파가 자유민주주의적 게임의 규칙에 갇혀 있다는 비판과 사회적 좌파가 성취할 수 있는 현실적인 변화를 무시한다는 비판은 모두 타당성이 있다. 이 때문에 당 좌파와 사회적 좌파의 연대를 촉구하고 사회운동과 정당운동의 새로운 결합을 모색하는 사회운동정당(Social Movement Party)이 유효한 대안으로 부상한 바 있지만(장훈교 2011), 한국적 사회운동정당으로서 민주노동당의 실추는 사회운동과 정당 간의 간극을 더욱 심화시켰고 진보정당의 분열로 귀결했다. 심지어 한국 민주주의의 대표적 이론가인 최장집은 사회운동의 힘을 정당에 집중시켜 ‘좋은 정당’을 만들어야 한다는 정당정치를 강조하면서, 사회운동과 정당정치를 상호 배제적으로 분리하는 논리를 더욱 고착시켰다(최장집 2006).[주8 최근 이성민은 정당 형태를 중심으로 형성된 맑스주의의 잊혀진 전통 가운데 하나인 연합(association)의 문제설정을 새롭게 재구성한 바 있다(이성민 2011). 그의 연합이 정치적 차원에서 분석가의 기능을 수행할 수 있을 것인지는 열린 과제로 남아 있는 것 같다. 연합의 문제의식에 관해서는 가라타니 고진(2007); 평의회 맑스주의에 대해서는 윤소영(2003); Mattick 외(2005); Pannekoek(2005) 참조.]

이런 맥락에서 보자면 지젝의 정신분석학적 정당 개념은 사회적 환상을 횡단하는 데 있어서 분석가로 작동하는 정치조직의 필요성을 적절하게 지적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에 관한 구체적인 사유와 분석 없이 원론적으로 정당이라는 이름만을 강조하는 한계가 있다. 그는 마치 정당 형태의 역사가 없었다는 듯이 초역사적이고 초월론적인 주장을 되풀이 하고 있을 뿐이다. 맑스주의의 위기를 간과하는 지젝의 혁명정당론이 한국 사회에서 자신의 적합한 정치의 장소를 발견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IV. 결론을 대신하여

 

지난 10년 동안 민주정부들은 한국 사회의 낡은 구체제를 혁파하는 수단으로서 자본주의의 ‘혁명성’을 이용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신자유주의적 개혁을 추진했고, 그 효과 가운에 하나는 국가 개입을 통한 시장권력의 강화였다. 하지만 사실상 과거 주요 기득권 세력이 신자유주의의 수혜자로 변신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에, 구체제는 사라졌어도 그 정점의 권력자들은 더 부강해지는 기이한 구조가 만들어졌다. 또한 시장의 자율성 확대가 노동의 시민권을 축소시키는 한에서 그것은 (민주정부들의 선의와는 무관하게) 민주주의의 절차를 준수하면서도 사회 전체를 탈민주화하는 역설로 귀결했다.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민주적 절차를 거쳐서 탈민주화가 급속히 진행되는 과정은, 한국 사회를 ‘민주주의인 것도 아니고 아닌 것도 아닌’ 기묘한 상태로 얽어 놓았다.

이와 같은 정세에서 한국의 라깡주의 정치는 어디를 향해 갈 수 있을까? 사회적 환상의 횡단을 증상과의 동일화로 해석할 때 그것은 등가연쇄를 구성하는 급진민주주의를 향해 있지만, 타자의 결여의 제도화가 결국 선거를 중심에 두는 정치를 가리키는 것이라면 자신의 ‘급진성’을 확보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여기에서는 선거 정치를 추구하는 데 있어서 ‘왜 라깡인가’에 대한 해명이 필요하다. 현대 민주주의의 핵심이 선거 정치에 있다고 보는 영미식 정치학에서 이미 수많은 관련 연구들을 축적해왔기 때문이다. 반면에 사회적 환상의 횡단을 환상과의 동일화로 재구성할 때 그것은 프롤레타리아 혁명론과 혁명 정당을 요청하고 있지만, 환상과의 동일화가 어떤 정치로 구현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논의가 없다. 여기에서는 환상과의 동일화 개념과 혁명 정치 사이에 해명되지 않은 이론적 단락이 있다.

또한 사회적 환상의 횡단과 관련하여 한 개인에 대한 정신분석의 끝에 해당하는 근본 환상의 횡단을 정치적 차원에서 논의할 때 라깡주의 정치에서 결정적으로 누락되어 있는 것은 분석가의 역할과 기능이다. 이 때문에 사회적 환상의 횡단을 통한 정치 주체의 형성에 관한 논의는 개인의 윤리적 결단을 요청하는 것으로 귀결하는 한계가 있다. 다만 지젝은 혁명 정당의 역할을 강조함으로써 분석가의 기능을 대행하는 정치 조직이 필수적이라는 점을 시사한다. 하지만 정당이 과연 혁명 정치를 전개하는 데 적합한 정치 조직 형태인지에 대해서는 이론적, 실천적 문제들이 존재한다. 더구나 한국에서 정당 정치는 역사적으로 자유민주주의 이외의 정치적 대안에 대한 상상력을 제약해왔다. 따라서 라깡주의 정치가 한국 사회에 뿌리내리기 위해서 주목해야 할 정치의 장소는 분석가의 역할과 기능을 수행하는 정치 조직의 구성에 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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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 The Parallax View. Cambridge/London: The MIT Press. 김서영 옮김 (2009). 󰡔시차적 관점󰡕. 마티.

----- (2007). How To Read Lacan. New York: W. W. Norton & Company. 박정수 옮김 (2007). 󰡔How To Read 라캉󰡕. 웅진지식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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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dmer, P. (1990). Subversion des Begehrens. Frankfurt am Main: Fischer Taschenbuch Verlag. 홍준기‧이승미 옮김 (1998). 󰡔욕망의 전복󰡕. 한울.